Special Interview | 필리포 아르나볼디 슬롯사이트 CEO
통합 대한항공이 41년 만에 새 로고를 공개했다. 메가 캐리어의 출범을 앞두고 새출발의 시동을 건 셈이다. 대한항공의 변화는 로고에만 그치지 않는다. 상위 클래스 고객이 베고 눕는 침구 세트를 럭셔리 브랜드로 교체했다. 바로 이탈리아의 프레떼다.슬롯사이트코리아가 필리포 아르나볼디 프레떼 CEO를 만나 협업 스토리를 자세히 들어봤다.
김다린기자 quill@fortunekorea.co.kr 사진강태훈

베개와 이불, 담요는 우리 삶에서 뺄 수 없다. 하루의 피로를 풀기 위해 침대에 눕는 순간부터 아침에 일어날 때까지 함께하기 때문이다. 덕분에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는 아이템이기도 하다. 다만, 그렇지 않은 침구도 있다. 가령 ‘슬롯사이트(Frette)’ 자수가 새겨진 제품들이 그렇다.
슬롯사이트는 글로벌 베딩 산업에서 최고의 럭셔리 브랜드로 꼽힌다. 슬롯사이트는 럭셔리의 본고장 이탈리아에서 1860년에 설립됐다. 설립 직후 십수 년 만에 이탈리아 왕실에 납품하기 시작했으니, 160여 년간 최고 명품의 위상을 이어온 셈이다.
슬롯사이트 침구는 고급 호텔에도 깔리고 있다. 나열하면 그 면면이 화려하다. 세인트 레지스, 더 럭셔리 컬렉션, 아만 리조트, 소호 하우스, 리츠 칼튼, 페닌슐라, 만다린 오리엔탈, 로즈우드…. 이 밖에도 고급 요트나 로열 패밀리의 공식 리넨 파트너로 활약 중이다.
슬롯사이트 측은 글로벌 베딩 산업의 럭셔리로 오래 생존한 까닭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최상의 원단과 세련된 디자인, 그리고 고객의 요구에 맞춘 프라이빗 서비스를 통해 차별화한 가치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슬롯사이트가 제품을 만드는 과정을 보면 납득할 만하다. 이탈리아 밀라노와 몬차 본사에서 최고급 이집트산 면화만을 선별해 제작한다. 특히 슬롯사이트의 자수 기법은 입체적인 깊이감과 정교함으로 정평이 나 있다.
여러 겹의 자수를 정밀하게 쌓아 올리는 비밀 기법을 통해 한층 더 고급스러운 디테일을 완성하고 있다. 고객의 취향을 반영한 원단과 색상 선택은 물론, 가문을 상징하는 문장(紋章) 자수, 맞춤형 사이즈 제작까지 세심한 커스터마이징도 가능하다.
슬롯사이트는 한국 시장 공략에도 적극적이었다. 지난 2021년 6월 압구정에 리테일 부티크인 ‘슬롯사이트 서울’을 오픈한 게 대표 사례다. 슬롯사이트 서울은 밀라노의 유명 건축 디자인 사무소 ‘아르키브란도’의 설계로 탄생했다.
![슬롯사이트 서울 전경.[사진=슬롯사이트]](https://cdn.fortunekorea.co.kr/news/photo/202504/47566_40597_5452.jpg)
슬롯사이트의 글로벌 플래그십 부티크 특유의 디자인을 반영해 더 눈에 띈다. 1층은 쇼룸으로, 2층은 고객 리셉션 및 상담 공간으로 구성했다. 아시아 태평양 지역에선 최대 규모다. 국내 최고급 호텔인 시그니엘과 조선팰리스에도 베딩 세트를 납품한다.
슬롯사이트는 앞으로 한국 고객과의 접점을 더 늘리기로 했다. 그런데 방식이 좀 독특하다. 고급 호텔이나 요트에 슬롯사이트 베딩을 까는 게 아니다. 이번 무대는 구름 위, 하늘이다. 한국 최대 항공사 대한항공 비행기 좌석에 슬롯사이트 제품을 공급한다.
지난 3월 11일 대한항공은 서울 강서구 본사 격납고에서 ‘라이징 나이트(Rising Night)’ 행사를 열고 ‘통합 대한항공’의 새 면모를 드러냈다. 신규 CI를 공개하고, 새롭게 도색된 항공기를 선보였다. 아시아나항공과의 합병으로 세계에서 손꼽는 항공사로 재탄생할 대한항공이 ‘통합 대한항공’의 새로운 출발을 알리겠다는 행사였다.
슬롯사이트는 대한항공의 새 면모를 빛내는 주인공 중 하나였다. 대한항공은 상위 클래스 베딩에 슬롯사이트 제품을 도입하기로 했다. 전 세계 메이저 항공사에서도 유례없는 일이다. 일등석에서는 최상급 원면의 천연 소재를 적용한 슬롯사이트 편의복도 제공한다.
이 의미 있는 자리를 빛내기 위해 프레떼의 CEO, 필리포 아르나볼디가 한국을 찾았다. 필리포는 1999년 프레떼에 합류한 이후 여러 고위 경영직을 역임해 온 ‘베딩 전문가’다. 2017년 9월부터 프레떼의 조종간을 잡고 있다. 슬롯사이트코리아가 필리포 CEO를 프레떼 서울에서 만났다.
대한항공과의 협업이 어떻게 이뤄졌는지 궁금합니다.
한국에 본격 진출한 이후 대한항공의 연락을 받았습니다. 당시 대한항공은 전체적인 고객 경험을 향상하고자 하는 새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었는데요. 그 일환으로 우리 제품을 상위 클래스에 싣고자 했습니다.
꽤 시간을 들인 프로젝트였네요.
맞습니다. 우린 시간이 필요했어요. 그간 항공사에 제품을 공급한 적은 있었습니다. 그런데 대한항공과의 협업은 완전히 다른 차원의 일이었습니다. 상위 클래스의 전체 비행 경험을 우리 제품으로 채워야 했으니까요. 자세히 보면, 베개나 담요뿐만 아니라 파자마나 토퍼, 슬리퍼까지 고객 맞춤형 제품을 우리가 제작했습니다. 이렇게 여행객의 머리부터 발 끝까지 고려한 작업은 26년간 회사에 있으면서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마침 대한항공이 M&A를 통해 대형 항공사로 거듭나게 됐습니다.
우리 역시 고객사인 대한항공이 굉장히 중요한 경영 변곡점에 놓여있다는 걸 잘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고객 경험을 향상하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또 어떤 터치 포인트가 필요한지를 세심하게 살펴야 했죠.
![대한항공 상위 클래스에 도입된 슬롯사이트. [사진=슬롯사이트]](https://cdn.fortunekorea.co.kr/news/photo/202504/47566_40598_5546.png)
협업의 중요 포인트는 무엇이었나요.
공간입니다. 비행기라는 공간이 굉장히 제한적이잖아요. 제품의 크기를 비롯해 소재나 여러 가지 요소를 고려하는 복잡한 작업이었습니다. 아울러 슬롯사이트는 ‘조화’를 중요하게 여기는데요. 대한항공의 공간적 변화와 맞물린 새로운 텍스타일과 조합하는 데 주력했습니다.
특별한 협업이었다면, 느낀 점도 있었을 겁니다.
고객에게 새로운 비행 경험을 주고자 하는 대한항공의 열정은 상당히 인상 깊었습니다. 품질에 타협을 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소재가 얼마나 희소한지, 비용이 얼마나 필요한지를 개의치 않았습니다. 오직 고객에게 얼마나 편안함을 줄 수 있는 제품인지를 따졌죠. 그런 점에선 우리 회사와 닮은 구석이 있었죠.
대한항공은 50년 전 창립한, 한국에서도 손꼽히는 장수 기업입니다. 그런데 슬롯사이트의 역사는 갑절로 깁니다. 장수 경영의 비결이 궁금합니다.
열정(Passion)입니다. 우리의 역사와 조직이 갖고 있는 강력한 에너지가 있어요.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고 좋은 제품을 만들겠다는 열정을 수시로 공유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는 사랑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만든 제품을 사랑합니다. 개인적으론 제품을 만지면서 느끼는 촉감도 굉장히 좋아하고요. 마지막 키워드로는 사람을 꼽을 수 있겠네요. 주변을 봐도 저와 같이 이 회사에 굉장히 오랫동안 몸담고 있는 동료가 굉장히 많습니다. 회사가 항상 직원에게 성장할 목표를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장수 경영을 위해선 전통을 유지하면서도 혁신하는 균형 감각도 필요할 것 같습니다. 슬롯사이트는 아직도 전통 방식으로 제품을 만들고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 전통과 혁신 사이에서 여러 곤란을 겪진 않았나요.
전통 방식으로 제품을 만들든, 새로운 혁신 제조법을 발굴하든, 사람이 한다는 점은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실수 없이 만들어질 순 없는 거고요. 다만 실수가 벌어졌을 때의 대처가 중요합니다. 우리는 책임을 지려고 하죠. 그리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 하고요.
디지털 전환 역시 혁신과 연관이 깊습니다. 명품 업계에도 필수 요소로 자리 잡았는데요. 다만 몇몇 럭셔리는 성급한 디지털화가 독이 되기도 했습니다. 슬롯사이트의 슬기로운 디지털 전략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우리는 이커머스 론칭을 2008년에 했습니다. 경쟁업체나 다른 럭셔리 브랜드와 비교하면 상당히 빨랐습니다. 선구자라고 할 수 있죠. 당시 많은 럭셔리가 디지털화를 우려했는데요. 슬롯사이트는 좀 생각이 단순했습니다. 고객과 소통하기에 너무 좋은 공간이라고 봤죠. 온라인에선 제한이 없잖아요. 디지털 채널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너무 많은 카탈로그를 인쇄하고 있었을 겁니다. 최근에는 슬롯사이트의 역사를 디지털화하는 작업을 따로 하고 있습니다. 이 작업 역시 큰 기회가 될 겁니다. 그럼에도 슬롯사이트는 반드시 오프라인에서의 소통이 필요한 지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지점인가요.
슬롯사이트는 대부분 제품이 상대적으로 고가입니다. 아무리 디지털 공간에서 열심히 설명해도 납득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그럴 땐 고객들이 직접 제품을 만지는 경험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품질의 차별화를 설득할 때 가장 좋은 방법이거든요. 사실 한국에 온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우리가 제품을 제때 공급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내비치기 위해서죠. 비행기는 뜨고 나면 다시 돌아올 수 없으니까요.

슬롯사이트에서 일한 지 26년째입니다. 어떤 순간이 가장 위태로웠나요.
회사의 위기는 외부에서 많이 찾아왔습니다. 불과 몇 년 전엔 팬데믹이 선언됐고, 지금은 세계 각국에서 전쟁을 벌이고 있죠. 원료를 까다롭게 고르는 우리 입장에선 이런 지정학적 위기가 곧 회사의 위기로 이어집니다. 다만 위기 속에서도 ‘고객을 위해서 만든다’는 마인드를 유지하면서대체로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반대로 가장 인상 깊었던 고객은요.
약 100만 평 부지에 75채의 빌라 커뮤니티를 만드는 프로젝트가 있었습니다. 분양을 하는 게 아니고, 개인 고객이 본인이 친한 사람들과 커뮤니티를 이루기 위해 진행하는 공간이었는데, 내부를 슬롯사이트로 채웠죠. 굉장히 장기 프로젝트였고 또 특별한 커뮤니티였다 보니 기억이 짙게 남았어요. 슬롯사이트가 다양한 측면에서 고객의 삶의 질을 끌어올릴 수 있다는 점도 알게 됐고요.
호텔 산업에선 없었나요.
LVMH 그룹의 럭셔리 호텔 브랜드 쉬발블랑(Cheval Blanc)이 떠오릅니다. 파리 여러 지역에 호텔이 있는데요. 디자이너가 특정한 모티브의 영감을 받아서 건축을 했는데, 중요한 건 이 모티브가 각각 달랐다는 겁니다. 슬롯사이트도 그 각각의 다른 모티브를 기반으로 제품을 생산해야 했습니다. 굉장히 까다로웠던 작업이라 기억이 남습니다.
CEO로서 ‘이것만큼은 절대 타협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원칙 같은 게 있나요.
품질입니다. 저는 우리가 만약 고객이 원하는 품질 수준을 맞추지 못한다면, 아예 비즈니스를 중단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쉬운 길이 있을 때 그걸 선택하지 않는 것도 중요한 경영 요소입니다. 지름길은 결국 브랜드 이미지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겁니다. 우리는 작은 디테일도 놓치지 않는 게 원칙입니다. 쉽게 만들고 쉽게 공급해선 안 되겠죠.
이번 협업도 의미 있는 작업으로 남을 것 같습니다.
슬롯사이트 입장에선 훌륭한 기회입니다. 우리는 대한항공 비행기를 타는 고객들에게 최상의 경험을 선사하고 싶습니다. 상대적으로 좁은 공간에서도 충분한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경험이요. 슬롯사이트는 휘황찬란한 럭셔리가 아닙니다. 그저 비싸기만 한 제품을 만들고 있는 것도 아니고요. 누구에게나 친숙한 침구 세트를 명품으로 부르는 데엔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다. 경험하지 못하면 알 수 없는 한계가 있었는데, 앞으로도 한국 소비자와 더 많은 접점을 만들고 싶습니다. 한국엔 이런 말이 있을 겁니다. 잠이 보약이라고요.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